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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기풍 목사

daywalker703 2023. 7. 8. 06:34

우리나라 최초 외지 선교사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
청년시절 마포삼열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피를 흘리게 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선교활동을
몹시 방해하던 혈기방장한 사나운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예수님이 환상으로
나타나서,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놀란 이기풍은 끈질긴 전도를 하던
스왈른 목사를 찾아가서 고백하고
1894년 마침내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1888년부터 1901년까지 스스로
성경을 들고 기독교가 척박한 함경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런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고 있던
마펫은 이기풍에게 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유,
1901년 장로가 되고, 1903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정식으로 입학.
1907년에 먼 훗날 3·1 독립운동 33인의
대표로 활약하였던 길선주, 양전백 등과
함께  장로신학교에 입학했다.

제1회 장로신학교 신입생은 이기풍을
비롯하여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 7명이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하던 해 독노회를
조직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독노회 결의에 따라
이기풍이 외지 교회의 선교사로 임명,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제주도에서
개척전도한 교회는 성내교회를 비롯해
성안, 금성, 성읍, 조천, 모슬포, 용수,
중문, 삼양, 한림, 법환, 세화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고 1918년에는
광주 제일교회(당시 북문교회)와
순천중앙교회의 초대목사로 부임했다.
이기풍 목사님은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앞장서서 거부,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다. 당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 존립을 흔드는 중대사였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강한 신앙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목사 안수받은 지 35년이 되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순교함으로 그의 강한 믿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명리보다
성도들의 영혼생명을 위한
깊은 사랑으로 참 목자의 삶을 살았으며,
목자의 사명 완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순교자였다.

우리는 친일파 한경직을 기억할게 아니라
이기풍ㆍ주기철 같은 참 목사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