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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한경직 목사

daywalker703 2023. 6. 16. 19:30

한경직 목사는 신사 참배를 한 친일파. 이선교 목사의
"다시 써야 할 한국교회사" 중에서 간추린 것.

환난의 현장에서 자기만 살기 위하여 양을 버리고
도망쳐온 한경직 목사 외 다수의 목사들이 또 도망쳐
고난에 동참하는 종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950년 6월 27일 종로 1가 기독교서회 2층에서
교역자들 약 40여 명이 모였다.

장로교: 한경직, 김종대, 김린서, 강원용
감리교: 김유순, 박만춘 성결교: 김유연

1946년 교회를 버리고 월남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가져야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의 말에
교역자들은 서울사수를 결의하였고
그 후 제일 먼저 도망친 분은 한경직 목사였다.

입으로야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1950년 10월 25일 장로교 한경직 목사,
선교사 아담스 목사, 권세열, 윤하영,
친일파 전필순 목사 등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오후 2시 서문밖 교회에서
3,000여 명의 신도들이 모여 위의
교역자와 함께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한경직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황은균 목사가 설교 했다.

1950년 11월 말경 평양시내 교회는
연합으로 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에
참석한 약 5,000여 명의 성도들은
첫 시간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세 쨋날이 지나고 네 쨋 날이 돌아왔을 때
강사와 교역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성도들은 영문을 모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강사와 교역자들은 영영 나타나지를 않았다.
알고 보니 미 고위 장성으로부터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듣고 강사 이대영 목사와
다른 목사들이 부흥회를 마치지도 않고,
또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않고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양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1961년 반란을 일으킨 지 35일 만인
6월 21일, 반란정부를 강력히 반대하는
미국정부에게 반란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기독교대표 한경직 목사와
최두선, 김활란, 정일권 등이 미국에 도착,
애원을 할 정도였다.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국보위 종교담당 정진경 목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입법부 조향록 목사, 김지길 목사 등
20명의 기독교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호화찬란하게 열렸다

A coward cannot be a leader